[고등학교 과학사]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와 헌신적인 어머니 – 현대 화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주기율표

러시아 과학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는 1960년 카를스루에(Karlsruhe)에서 열린 제1회 국제화학학회에서 칸니차로가 발표한 원소에 대한 이론을 듣고 지적 호기심을 갖게 됩니다. 그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에서 화학 공부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독일 카를스루에는 도시 중앙에 위치한 궁전을 중심으로 방사환상거리로 연결된 전형적인 방사형 계획도시. 사진 출처 : 국토와 교통

대학을 졸업한 후 독일의 저명한 분광학자 ‘분젠’과 만나 분젠 교수는 원소를 가열해 각 원소마다 독특한 스펙트럼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멘델레예프의 지적 호기심을 더욱 높이게 됩니다.

버너를 발명한 독일 과학자 분젠과 리튬 나트륨 칼륨 구리의 불꽃 반응. 그림출처 : LG사이언스랜드 이후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온 멘델레예프는 원소의 화학적 성질과 원자량을 이용하여 주기율표를 완성합니다. 단순히 원소를 나열할 뿐만 아니라 원소의 순서가 의미하는 구조를 통찰했습니다. 당시까지 알려진 63위안소의 원자량과 성질을 카드에 적어 실험실 벽에 붙여 놓고 고민합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① 세로방향 : 원소를 가벼운 것부터 무거운 것 순으로 배열 ② 가로방향 : 화학적 성질이 비슷한 원소 배열

멘델레예프와 원소 주기율표 출처 : 유튜브 허풍이쇼. 멘델레예프 주기율표

그러자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듯 전체 윤곽이 드러났습니다. 예측할 수 있는 주기적 경향을 찾은 거죠. 그래서 멘델레예프는 과감하게 자신의 표에 빈칸을 남겨두었습니다. 아직 발견하지 못한 원소가 있었던 것입니다. 멘델레예프는 원소를 세로축에서 원자량 순으로 배열한 후 가로축에서 원자가 1, 2, 3, 4 순으로 배열했습니다. 오늘날 #원자가(valence)는 원자가 전자를 잃거나 얻거나 공유하면서 결합하는 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 즉 원자량을 당량으로 나눈 값이라고 할 수 있다. 기준으로는 수소를 취하고 수소원자를 1가로 한다. 예를 들어, 물 H-O-H는 H에서 나오는 결합의 손은 하나 O에서 나오는 손은 두 개이고 산소 원자의 원자가는 2이다. n개 수소원자와 결합하는 원소의 원자가는 n이, m개 산소원자와 결합하는 원소는 2m가 이다.

멘델레예프가 손으로 그린 주기율표의 일부.ⓒ 위키미디어

주기율표가 작성되면서 멘델레예프와 화학자들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원소의 존재뿐만 아니라 행동 방식, 밀도, 녹는 점 등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 덕분에 가져온 행운이었습니다. 갈륨(Ga), 스칸듐(Sc), 저마늄(Ge)이 차례로 발견되고 빈칸은 채워집니다.

1870년 독일 학술잡지에 실린 멘델레예프 주기율표를 바탕으로 만든 주기율표의 일부.그림 출처 : 뉴턴 하이라티트 시리즈 화학1870년 독일 학술잡지에 실린 멘델레예프 주기율표를 바탕으로 만든 주기율표의 일부.그림 출처 : 뉴턴 하이라티트 시리즈 화학당시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 구조와 형태가 어떻게 결정됐는지는 몰랐지만 1920년대 양자역학이 등장하면서 원자구조와 화학결합의 본질이 밝혀지면서 그 비밀이 풀리게 됐다고 합니다.스칸듐, 갈륨, 저마늄은 멘델레예프 이후 발견된 것이고 101번 멘델레빔은 그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원소입니다. 그림 출처 : 사이언스 타임즈멘델레예프의 첫 번째 주기율표는 이후 현대 화학 발견에 크게 기여합니다. 그는 1906년 노벨 화학상 후보에 올랐지만 이듬해인 1907년 사망해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했습니다. 주기율표 101번째 원소는 그의 이름을 따서 #멘델레뷰무(Md)라고 불립니다. 이러한 멘델레예프의 업적이 있기까지 큰 보살핌을 받은 그의 어머니 ‘마리아 드리트리브니’의 헌신은 눈물겹고 안타깝기까지 합니다.읽을거리: 멘델레예프의 어머니 마리아 드미트리브니 1869년 원소주기율표를 만들어 근대 화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과학자 멘델레예프. 그의 뒤에는 과학의 진실을 추구하라는 유언을 남긴 어머니가 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유언을 인용해 논문에 신성한 말이라고 기록했다.마리아 드리토니브니멘델레 예프는 러시아·시베리아 토보루 스쿠로 16명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여성이 고등 교육을 받지 못하는 현실에 분개하는 독학에 몰두했다”신세대”여성이었다. 멘델레 예프의 아버지는 고등 학교 교장이었는데 심한 눈병에 의한 실명에서 실직하고 집이 기울어졌다. 이때부터 어머니는 대가족을 이끌기 시작했다. 그녀는 멘델레 예프 외 할아버지의 유리 공장을 인수하면서 사업을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하지만 멘델레 예프의 아버지가 사망하고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하는 등 불행한 일이 계속 집은 발칵 뒤집혔다.어머니는 마지막 희망을 아이까지, 멘델레 예프를 모스크바 대학에 입학시키기 위해서 고향을 버리고 모스크바로 향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57세. 눈보라 속에서#우랄 산맥을 넘어#볼가 강을 건너는 3000킬로그램이 조금 넘는 험한 길이었다. 그러나 천신 만고 끝에 도착한#모스크바 대학은 입학하지 못 했다. 그동안 멘델레 예프의 성적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멘델레 예프는 당시 어머니의 낙담한 얼굴을 평생 잊지 못했다고 한다.어머니가 선택한 차선책은 아버지의 모교#상크토페텔스불크 대학 의학부였다. 입학은 무난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해부학 수업 시간에 시신들을 보고 놀라서 기절했기 때문이다. 의대생 자격이 박탈됐다.이듬해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고 아버지가 다닌 교육학부에 멘델레 예프를 입학시키려 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학생 시위 때문에 그 해에는 전과의 신입생 모집이 중단된 상태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동급생의 총장에 매달리고 사정했다. 어머니의 필사적인 애원에 감동한 총장은 예외적으로 원서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멘델레 예프는 수리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긴 실패 끝에 본격적인 학문 탐구의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멘델레 예프 가족에 큰 불행이 찾아왔다. 어머니가 멘델레 예프가 입학하고 며칠 후에 사망한 것이다(1850년). 자녀 교육에 혼신의 힘을 쏟았기 때문이다. 당시, 멘델레 예프의 나이는 16세. 멘델레 예프는 어머니의 모습을 소중히 하는, 도시의 낯선 환경에서 열심히 공부했다러시아 티유멘스카야 오브라스트 토보르스크 러시아 티유멘스카야 오브라스트 토보르스크대학 제방 7/9 상트페테르부르크 199034 대학 제방 7/9 상트페테르부르크 199034러시아 우랄산맥 러시아 우랄산맥러시아 우랄산맥 러시아 우랄산맥러시아 우랄산맥 러시아 우랄산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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